2001년 7월 4일
흐릿한 창 그리고 바트랄
<게스트하우스에서 본 어린이궁전>
창을 등지고 새우잠을 잔 탓에 따가운 아침 햇살이 목덜미를 찌르며 잠을 깨웠다. 먼지 낀 창을 통해 흐릿하게 다가오는 울란바타르의 아침이 불안한 필드워크의 상황을 암시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창문을 여니 맑고 투명한 텡그리가 나를 압도해온다.
먼저 간바트에게 전화했다. 어제 공항에서 너무 갑작스럽게 만나 차분히 대화하지 못했던 것을 사과했다.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며 마음에 두지 말라고 말했다. 우리는 점심때 쯤 다시 연락해서 오늘 저녁에 만날 장소를 정하기로 했다. 그 다음 수렌 바트랄에게 전화해서 찾아가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외무부에서 대외협력부 카운슬러로 일하고 있었다. 대충 아침식사를 차려 먹고 수흐바타르 광장 남단에 위치한 외무부 건물을 찾아갔다.
<수흐바타르 광장에서 본 외무부 건물(중앙)>
로비에서 '바드랄'을 만나러 왔다고 하니 경비원들은 누군지 모르겠다며 어리둥절해했다. '바드랄'이라는 이름을 여러 번 반복하니 "아, 바트랄" 하면서 전화를 걸어줬다. 잠시 후 깔끔한 드레스셔츠에 타이를 멘 바트랄이 나왔다. 작은 키였지만 다부진 몸의 그는 지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했고 영어도 자유로이 구사했다. 우리는 인사를 나누고 필드워크의 내용을 설명한 후 협조자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지금은 그만이 몽골인들에게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였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기다려 달라고 말한 후 떠나갔다. 로비 쇼파에 30분 정도 앉아 있으면서 중진 관료인 그가 생면부지의 한국인 연구자들을 성실히 도와줄 것인가 하는 생각에 불안했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바트랄은 밧조릭(Batjorig)이라는 젊은 몽골인을 데리고 다시 나타났다. 밧조릭은 몽골과 한국이 수교한 초기인 1992년에 한국에 유학 가서 경남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했고, 귀국 후에는 무역 관계 일을 하다가 지금은 잠시 쉬고 있었다. 첫인상은 무뚝뚝해 보였다.
도르치파금
잠시 후, 바트랄은 우리를 외무부 뒷편의 한 건물로 데려갔다. 그곳은 징기스한 시대의 의상을 연구하고 복원하는 연구소였다. 안으로 들어가니 역사학자 도르치파금과 다른 여성 한 명이 전통 의상을 만들고 있었다. 바트랄은 도르치파금에게 우리를 소개시켜 준 후 사무실로 돌아갔다.
매서운 눈빛의 도르치파금은 왜 샤먼들을 만나려는지 알고 싶어했다. 그녀의 얼굴에 경계의 빛이 감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샤먼에 대해 부정적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몽골 샤머니즘에 공감적으로 접근하고 있으며, 지난 해 몽골에 왔을 때에도 샤먼들을 만났던 것을 이야기했다. 우리의 호의적 태도를 확인한 그녀는 필드워크를 위한 정보를 주었다.
도르치파금은 우리가 지난해 만난 샤먼들 대부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가 서울에서 가져간 수미야, 롭스타이, 바얌바도르지 등의 사진을 보며 즐거워했다. 그러다 바이라 이야기를 꺼내자 정색하며 "영험한 샤먼이었던 그녀가 한 달 전에 죽었다."고 이야기했다. 자본주의의 트라우마와 관련하여 바이라를 꼭 만나고 싶었던 나는 충격을 감출 수 없었다. 지난 해 왔을 때 알콜중독에 시달리고 있었던 바이라에게서 도시 이주에 따른 상처를 예감했지만, 결국 그렇게 세상을 떠날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놀란 얼굴을 본 그녀는 샤먼 일을 하고 있는 바이라의 딸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도르치파금은 지금 하는 일이 바빠 우리를 직접 안내할 수 없는 대신 샤먼 잉흐자르갈을 소개해주기로 약속했다. 헤어지면서 그녀는 원래 외부인들에게는 샤먼을 소개해주지 않지만 바트랄이 친구여서 특별히 도와주는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아무튼 어려운 첫 관문을 통과했다. 필드워크를 떠나기 며칠 전, 필드워크를 도와주기로 했던 쩨쩬이 리투아니아에 간다는 메일을 받고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웹상에서 연결할 수 있는 몽골인들에게 협조를 바라는 메일을 보냈다. 바트랄은 인디애나 주립대학 몽골학회와 협력해서 웹사이트를 운영하고 있어서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메일을 보냈지만 일정이 너무 촉박하고 서로 커뮤니케이션도 없어서 거의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를 통해 몽골인들의 종교와 문화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필드워크는 우연한 만남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경험의 과정이다.
밧조릭과의 대화
도르치파금의 연구소에서 나와 수흐바타르 광장 오페라하우스 옆 노천카페에서 밧조릭과 필드워크 계획을 상의했다. 우리는 '나담' 전에 많은 이들을 만나야 했다. 지난해에도 경험했지만 나담 축제가 끝나면 많은 몽골인들이 여름별장으로 휴가를 떠나버린다. 특히 이번 나담은 '인민혁명 8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여서 연휴 5일 동안에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우선 우리는 샤먼들과 라마승, 일반 신도, 유목민들을 폭넓게 만나본 후 연구에 중요한 몽골인들을 정해 집중적 만남을 갖기로 했다.
환율이 은행보다 유리했기 때문에 여행사에 들러 달러를 몽골 투그릭으로 환전한 후 멕시칸 레스토랑에 가서 밧조릭과 계속 대화를 나눴다. 그는 한국의 상황, 외국인노동자 문제 등을 잘 알고 있었고 한국에서 불법체류자로 체포된 몽골인을 면회하러 간 적도 있었다. 2백만을 조금 넘는 몽골 인구 중에 1만 5천명이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 그러니 이렇게 저렇게 연결하면 대부분의 몽골인들은 한국에 들어간 이주노동자들과 직, 간접적으로 관계하는 셈이다.
지난해 헙스걸 호수 동편, 샤먼 롭스타이의 통나무집에서 만난 몽골 청년이 생각났다. 울란바타르에서 의대를 다니고 있는 그도 한국에 일하러 갔다가 IMF 때문에 임금도 못 받고 몽골로 돌아와야 했다. 그는 피해를 입었으면서도 기회만 된다면 다시 한국에 가고 싶다고 고백했다. 왜냐고 물으니 의사 한 달 월급이 100달러에 불과한 경제사정이니 아무리 힘들어도 한국에서 일하는 것이 큰 돈벌이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때 그의 동생도 성남의 신발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밧조릭은 한국에 대한 반감을 나타내지 않았지만 한국인에게 피해 입은 몽골인들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무거웠다. (이 문제는 이후 몽골인들을 만날 때마다 반복되었다.)
밧조릭은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종교에 대한 반감은 없었다. 그런 태도는 대부분의 몽골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최근 종교적 부흥에 대한 사회적 반감도 있는 것은 아닐까. 몽골에 들어오기 직전 한 몽골 신문에서 샤먼 살해 사건 기사를 읽었다. 기사 내용은 자기 어머니와 결혼하려고 한 남성 샤먼의 목을 잘라 살해한 젊은이에 대한 것이었는데, 논조는 '미신'이 부활하면서 사회문제를 야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기자는 간단사 같은 큰 사원 앞에서 점치고, 주술 행위를 하는 미신이 확산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밧조릭은 그 신문이 사회주의적 언론이기 때문에 그런 기사를 내보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몽골인들은 샤머니즘에 대해 부정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Passage Market
점심 후 필드워크 동안 먹을 음식을 사러 'Passage'라는 마켓에 갔다. 우리는 필드워크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아침과 저녁 식사는 가급적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들어 먹기로 결정했다. 숙소에는 전기곤로와 식기 일체가 있어서 취사에도 문제가 없었다. 패시지는 이름 그대로 외국인 여행자들이 주로 찾는 시장으로 고기, 야채, 과일 등 온갖 음식을 장만할 수 있다. 여러 가게를 한 곳에 모아놓은 형태로 상점 간의 가격 차이도 거의 없어 물건만 괜찮으면 여러군데 돌아다닐 필요가 없다. 시장에는 몽골 특유의 양고기 냄새가 진동한다. 쌀과 계란, 중국산 사과, 식용유, 감자, 양파, 당근 등의 야채와 우리가 만날 몽골인들에게 선물할 보드카 등을 샀다.
정치적 박해 박물관
아직 몽골인들과 약속한 것이 없기 때문에 먼저 1930년대의 정치적 박해 박물관을 방문하기로 했다. 초이진 라마 사원 옆에 있는 이 박물관에서는 내 연구 주제 중 하나인 역사적 '트라우마'와 관련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미리 전화하고 찾아갔음에도 관리인이 자리를 비워 들어갈 수 없었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몽골인 몇 사람이 와서 문을 두들겨보더니 안에 아무도 없는 것 같다며 떠나갔다. 결국 우리도 발길을 돌려야 했다. 숙소에 돌아온 후 밧조릭에게 오늘 안에 잉흐자르갈과 연락하여 약속을 잡고 내일 아침 일찍 와달라고 부탁했다.
간바트와의 저녁식사
오후 6시 수흐바타르 광장 근처 노천 카페에서 간바트를 만났다. 그는 중국음식점을 겸한 몽골음식 레스토랑으로 안내했다. 나는 간바트와 똑같은 몽골 음식을 시켰는데, 국수와 양고기를 섞은 그것은 생각했던대로 짜고 느끼했다. 양도 너무 많아 겨우 반 정도 먹고 젓가락을 내려놓아야 했다.
스물 일곱 살의 간바트는 미국인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각 지역 정보를 모으는 일을 하고 있다. 주로 고비사막과 초원지대의 정보를 수집해 데이터베이스를 만든다. 마침 오늘이 미국의 독립기념일이어서 회사에 출군하지 않았다. 하지만 휴일이면 사무실에 가서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을 즐긴다. 그는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가족이 불교를 믿고 있고, 자신도 종교에 대해 개방적 태도를 갖고 있다. 요즘은 그리스도교 교회에 나가는데 신앙 때문은 아니고 단지 '교제'를 위해서이다.
그는 사회주의에 대해 무척 비판적이다.
몽골의 사회주의 시대는 모두가 평등하게 가난한 사회였어.
하지만 자본주의가 반드시 긍정적인 것은 아니야. 금융자본이 통치하는 세계화의 시대에 '20 대 80'의 격차는 더 커질 수밖에 없어.
인정해. 하지만 자본주의가 몽골에 더 많은 기회를 주는 것은 사실이야.
간바트는 현재 몽골의 종교 현상에 대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몽골의 기독교는 선교사들의 열정에 의해 초기에는 증가했지만 이제는 오히려 감소 추세로 접어들고 있어. 그 이유는 시장경제의 확대에 따라 사람들이 물질적 관심만을 갖기 때문이야.
하지만 물질적 욕망 때문에 기독교인 수가 감소한다는 이야기는 잘 납득이 가지 않았다. 현대 기독교야말로 자본주의적 정신을 촉진하는 종교이지 않은가? 또한 물질적 관심 때문만이라면 모든 종교의 성장이 둔화되어야 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이 확산되면서 기독교의 성장이 약화되었다기 보다는 몽골의 불교와 샤머니즘이 물질에 대한 관심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가 경쟁력을 갖지 못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한국의 통일문제, 미국과의 관계 등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기본적 이해는 갖고 있었지만 구체적 지식은 부족했다. 왜냐하면 한국인을 직접 만난 것은 우리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몽골에 있는 동안 간바트와는 서로의 사회, 문화에 대해 폭넓은 대화를 나눌 기회를 더 가질 수 있었다.
간바트에게 인터넷은 세계로 열린 창이다. 그는 여러 나라 친구들과 이메일을 교환하고 있고, 그런 인연으로 몽골을 찾아온 서양 친구들도 몇 명 있었다. 그는 나와 이메일을 교류한 후에 내 홈페이지에 자주 들어왔지만 한글로만 되어 있어서 내용을 알 수 없었던 것이 유감이라고 이야기했다. 사이버스페이스가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축소한다는 비판은 설자리가 없는 것 같다. 인터넷은 우정과 만남을 세계화한다.
<간바트와 함께>
식사를 마친 후 수흐바타르 광장으로 걸어가다 오페라 하우스 뒤에 북부 유목민들의 'Yurt'(텐트)와 나무로 깍은 신상들이 전시되어 있는 곳을 발견했다. 관리 상태도 허술하고 전시용이어서 생동감을 느낄 수 없지만 사회주의 시대 웅장한 건축물들과의 언밸런스가 인상적이다. 몽골 유목민들은 대부분 둥글고 납작한 원형의 'Ger'에서 살지만, 헙스걸 아이막 같은 북부로 가면 원뿔형의 유르트도 쉽게 볼 수 있다. 모양은 다르지만 연기가 빠져나가도록 천장에 구멍이 있고, 나무로 기본 골조를 만들어 그 위에 천을 두르는 형태는 동일하다.
간바트는 수흐바타르 광장 주변의 건물 대부분은 러시아인들이 설계하고 중국인들이 만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몽골인들은 대부분 초원에서 유목생활을 했기 때문에 도시 건설에 동원할 노동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한편 광장 북단의 웅장한 정부청사는 일본인이 설계한 것이다. 그런 건물들은 사회주의 시대의 건축물답게 우람한 덩치를 자랑하지만 권위주의 통치의 이미지도 느끼게 한다.
수흐바타르 광장 남단의 몽골 텔레콤 건물 맞은 편에는 조그마한 흰색 건물이 하나 있는데 자유민주연합 당사이다. 일련의 선거에서 패배해서인지 위축된 모습이다. 건물 옥상에 휘날리고 있는 깃발은 푸른 삼각형이 양쪽으로 붉은 삼각형을 밀어내는 형상이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사회주의를 밀어내는 것을 상징한다. 하지만 자유민주연합이 다시 구 공산단 계열의 몽골인민혁명당(MPRP)에 정권을 잃게 된 것은 지독한 부패 때문이었다. 색채는 이념의 대립을 표상하지만 현실에서는 빨간 색이든 파란 색이든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의 이상을 온전히 담아내고 있지 않다. 또한 몽골의 좌, 우파는 색깔만 다를 뿐 시장경제의 이념적 지향성을 수용하고 있고, 부패와 무능의 차원에서는 어느 정치세력이나 다 마찬가지라는 냉소주의가 팽배해 있다.
몽골이 사회주의 국가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은 도시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념적 선동 벽화들이다. 비록 색이 바래고 모자이크 타일도 군데군데 떨어졌지만 사회주의의 이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멋진 벽화들이 많다. 바양골 호텔로 가는 길에 위치한 국립중앙도서관 벽에도 몽골 남자 하나가 말을 타고 힘차게 달리는 모습을 담은 모자이크가 있다. 그것은 몽골이 봉건주의로부터 벗어나 사회주의로 돌진했던 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 이미지는 지금도 역동적이지만 살아있는 것 같지는 않다.
간바트는 다음에 만나면 몽골 종교, 역사, 문화에 대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료들을 주겠다고 했다. 그는 이번 주말에 테를지에 출장 다녀오므로, 일요일에 다시 만나자고 제안했고, 우리는 일정을 보고 다시 연락하자고 답했다.
게스트하우스에 돌아와 하루 동안의 경험을 랩탑 컴퓨터로 기록하고 있을 때 밧조릭이 내일 샤먼 잉흐자르갈(Inkhjaargal)을 만나기로 했다고 전화했다. 이제 내일부터 본격적인 종교,문화 필드워크를 시작하는 것이다.
바이라
지난 해 울란바타르에 왔을 때 북부 헙스걸 아이막 차강노르(White Lake) 출신 샤먼 바이라의 집을 방문했다. 그때 그녀는 알콜릭에 시달리며 황폐한 삶을 살고 있었다. 영험하다고 소문난 그녀였지만 결국 도시에서 목숨을 달리해야 했던 그녀에게서 자본주의의 트라우마를 예감한다. 도시로의 이주가 그녀에게 어떤 해악을 끼쳤는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지난 해 몽골 최북단 차강노르에서 그녀의 이복언니 바트카(Badka)를 만났다. 그녀의 삶은 조화롭고 평온했다. 정갈한 통나무집에서 흥겹게 노래하며 즐거워하던 그녀의 가족은 노동과 의례를 조화롭게 향유하고 있었다. 반면 고향을 떠나 울란바타르에서 힘겹게 살았던 바이라의 대조적 삶은 자본주의의 트라우마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녀의 힘겨웠을 말년은 샤먼으로서의 진정성을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공간의 이동에서 겪는 영적 혼란과 갈등이 그녀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한 것은 아닐까?
<어머니 수렌의 아사르에서 바드카, 2000년 차강노르>
샤머니즘에 대한 관심
필드워크를 떠나기 전 몽골 샤머니즘에 대한 개괄적 페이퍼를 마무리지으면서 "샤먼과 샤머니즘은 초원을 닮았다"라고 기술했다. 혹독한 추위와 큰 화재, 심한 가뭄으로 죽어버린듯한 초원이어도 비 내려 대지를 적시면 금새 생명의 세계로 부활하는 것처럼, 샤머니즘 역시 역사의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생존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샤머니즘을 연구해왔지만, 종교의 靜的 차원에 이끌리는 내게 샤머니즘은 여전히 부담스러운 종교현상으로 남아있다. 물론 고통의 연대, 구원의 직접성, 세계의 통전성을 일상에서 수용해내는 종교성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고, 주변화된 가치를 재해석함으로써 복권시키는 것은 중심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에서 샤머니즘 연구를 계속해왔다. 하지만 고민은 계속된다. 내 종교적 취향과 일치하는 종교현상만을 대할 경우 동질감이 주는 평화를 누릴 수 있겠지만 지평 확장에 도움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과 함께 그런 의식적 조정이 나의 본성을 억압하는 것이라는 판단이 충돌한다. 이번 필드워크에서 그 갈등을 극복할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