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1/04 21:18
[사색]
아직 하늘은 춥고 땅은 얼어 붙은 겨울이기에 어머니의 방을 하늘도 땅도 아닌 제 마음 깊은 곳에 만들었습니다. 이곳에서 못다한 대화를 나누다가, 제 안과 밖이 모두 따뜻해지고 지금의 슬픔이 이해로 바뀌게 될 때, 저편 신비를 향한 여행으로 어머니를 떠나보내드리렵니다. 그 방이 춥지 않도록 온기를 더해 주신 길벗들께 마음 다해 감사드립니다.
2009-02-10
정경일: 엄마, 어제 밤 삼성동 집에 전화를 했는데, 아무도 안 받는 거야. 근데, 참, 웃기지. 늘 그랬던 거처럼, '엄마 어디 나가셨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지 뭐야. 그리고는 슬펐는데... 이상하게 웃음이 나더라고. 내가 습관의 힘 탓에 순간 잊은 건 엄마가 아니라,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이었어. 그걸 깨닫고는, 뭐랄까, 슬픈데도 마음이 좋더라. 그런 거야. 사랑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시간이 많이 흘러도 서로를 잊지 못하는 거야. 가끔, 잠시 헤어져 있다는 걸 잊을 뿐이지. 아버지 말씀이 맞아. 엄마가 한 10년 정도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걸로 생각하시겠다는. 그래, 엄마가 여행중이라는 사실을 또 잊게 될 가능성이 높지만 엄마를 잊을 일은 없으니, 맘 편히 잘 다녀오라고. 사랑해. 2009-02-15
정경일: 엄마, 지난 주일 점심, 칼국수와 같이 먹으려고 단무지를 썬 후 고추가루를 뿌려 무치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어. 그 고추가루 한참 전에 엄마가 빻아서 보내준 거잖아. 냉동실에 넣어두고 조금씩 꺼내 쓰니까, 지금까지도 많이 남아 있었던 거야. 고추가루 다 떨어질 때 쯤이면, 이 일상적 슬픔이 제사 지내거나 추모예배 드릴 때 느끼는 기념과 감사의 마음으로 바뀌게 될까? 잘 모르겠어. 하지만 한 가지는 알겠어. 내 슬픔은 엄마에게 감사하는 내 마음 때문에 더 깊어지고 있는 거라는... 고마워. 2009-03-17
정경일: 주말에 영화를 한 편 보는 데 엄마 생각이 나데. 내가 워낙 영화를 좋아해서 엄마에게도 영화 좀 보러 다니라고 자주 권했잖아. 엄마도 친구들하고 영화 보러 갈 때면, 재미있는 영화가 뭐냐며 묻고는 했지. 내가 무슨 영화가 좋다고 하면, 그때마다 엄마는 꼭 되물었어. "그거 한국영화니?" 내가 외국영화라고 하면, 이제는 눈이 어두워져서 자막 보는 게 불편하다고 했지. 엄마 말 듣고 정신이 퍼뜩 들더라. 그런 거였어. 우리 사회의 문화라는 게 늘 젊은이들 중심이어서, 다른 세대의 사회구성원들에게는 벽을 느끼게 했던 거야. 그렇지. 젊은이들도 빠르게 달리는 자막을 놓칠 때가 있는데, 눈 침침해진 어르신들은 오죽하시겠어. 사실 난 외국영화를 한국말로 더빙한 걸 별로 안 좋아했었어. 배우들의 목소리에 실린 감정을 그대로 느낄 수 없어서. 근데, 엄마랑 이야기하면서 생각이 바뀌었어. 문화의 평등한 향유를 위해서는 우리말 더빙을 확대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 어린 시절, 그만 자라는 엄마, 아빠의 타박을 들으면서도 꿋꿋이 ^^ 밤늦도록 보았던 [주말의 명화]나 [명화극장]이 내 정신을 풍요롭게 한 데는, 감칠맛나는 성우들의 우리말 더빙이 한 몫 했지. 아무튼, "동방예의지국"임을 자랑해온 우리 사회가 문화적 "노인 차별 ageism"을 극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 2009-03-30
정경일: 엄마, 인하가 벌써 여섯살이잖아. 가끔, 언제 인하가 가장 사랑스러웠나 돌이켜 볼 때가 있는 데, 그때마다 "지금"이 가장 사랑스러운 때라는 생각이 들어. "언제나" 사랑스럽다는 거겠지. 문득 궁금해지네. 부모 입장에선 아이의 나이에 상관없이, 늘 "지금" 그 순간의 아이가 가장 사랑스러운 건가? 아마 그럴 것 같아. 그럼, 엄마... 지금의 나도, 이렇게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는 나도 사랑스러워? ^^ 2009-04-23
정경일: 엄마, 오늘은 Mother's Day여서, 인하가 주일학교에서 종이로 만든 꽃을 길아에게 주었어. 근데, 길아가 부러운 게 아니라, 인하가 더 부럽더라. 꽃을 줄 자기 엄마가 있으니까. 어머니날이 있는 주간이라 그런지, 지난 주 여기 친구들이 유난히 내 걱정을 많이 해줬어. 엄마 생각 많이 나겠다면서. 그때마다, 이상하지, 꼭 눈물 한 방울이 왼쪽 눈에 맺히는 거야. 이슬처럼 말이야. 눈물이 많이 나는 것도 아니고, 왜 또 꼭 왼쪽 눈이었을까? 아무튼, 엄마 떠나고 나서 몇 달 동안의 내 마음을 다섯 글자로 요약하면 이거야. "있을 때 잘해." 단순한 말인데, 그게 자식들이 알고 실천해야 하는 모든 거 같아. 다행인 건, 엄마는 지금도 "있다는" 거야. 다른 방식으로. 그래, 엄마, 내가 꽃이 될게. 나를 받아 줘. 응? 2009-05-11
정경일: 엄마, 사 년 만에, 처음으로 한글로 쓰여진 소설을 읽었어. 한강의 [아기부처]야. 좋았어. 삶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무척 깊더라. 자기 안의 부처를 악마로 만드는 건 결국 자신의 마음이라는 불교적 관점도 담겨 있고. 특히, 주인공 선희의 어머니가 북한산을 함께 오르다 딸에게 해 준 이야기가 인상 깊게 남아. "집에서도 이 산을 보고 있으면, 저 뒷자락에 네가 살고 있으려니 싶었으니... 이 산이 너를 나하고 이어주는 것 같아 고맙기도 하고, 더 커 보이기도 하더라." 그 산을 두 사람 사이를 가로 막고 있는 장해가 아니라 두 사람을 잇고 있는 연결체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좋았어. 지난 겨울까지는 태평양이 엄마와 나를 이어주었다면, 지금은 무엇이 우리를 이어주고 있는 걸까? 2009-08-18
정경일: 스카이프에 있는 전화번호들을 정리하면서 엄마 핸드폰 번호를 지울까 했는데... 결국 그대로 남겨 두었네. 이승과 저승을 잇는 전화선이 있다면 세상이 확 달라질까? ^^ 2009-08-20
정경일: 지난 주일은 가톨릭의 "모든 성인의 축일"이었어. 세상 떠난 이들을 추모하는 날이야. 어제, 우리 학교에서도, 지난 1년 동안 돌아가신 분들을 추모하는 예배를 드렸어. 예배 중에 엄마 이름도 불리어졌고. 난 엄마 이름을 추모 노트에 적고 촛불 하나 밝혔지. 제사 지내는 느낌이더라. 좋았지. 근데, 유니온 공동체와 관련된 많은 이들이 세상을 떠났더군. 그러고 보면, 슬픔의 보편성이 위로가 되기도 하는 것 같아. 참, 우리 부부 결혼 10주년 기념 "지혜의 말씀"에 엄마가 2007년에 보낸 이메일을 실었어. 그리고, 맨 앞 헌정사(?)에 "내게 생명과 사랑을 주신 고 김순임 사모를 위해 (For my mother Soonim Kim who gifted me life and love)"라고 썼어. 맘에 들어? ^^ 2009-1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