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7월 9일
태양은 참... 한결같다. 수십 억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세계를 깨우는 그가 오늘도 뜨거운 해일을 일으키며 등장한다. 게스트하우스 침실에 엉성한 커튼이 있긴 하지만 빛과 열의 쇄도를 막진 못한다. 그 속에 계속 누웠다간 미이라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잠결에도 피식 웃다 잠이 깬다. 물기없는 아침이어도 기분이 상쾌한 까닭은 웃으며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감의 밀도...
고전적 인류학자 말리노프스키(B. Malinowski)는 현지인들을 이해하려면 최소한 한 차례 정도의 계절의 순환, 그러니까 1년 정도의 기간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필드워크 원칙을 상기하면 우리는 "entering"에서 멈추는 건지도 모르겠다. 한정된 시간 속에서 자아와 타자의 상호변화를 가져올 만큼의 충실한 만남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
무작정 긴 시간이 주어진다고 해서 타자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같이 수 십년을 살더라도 서로를 전혀 모를 수 있고, 스치듯 지나면서도 마음이 소통하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타자에 대한 감수성, 상상력, 공감의 '밀도'인 것이다. 그것을 지향하는 '지금 여기'의 의미적 시간은 시침(時針)의 운동에 갇히지 않는다. 공감의 밀도...
체데브 교수
대충 아침 식사를 챙겨 먹고 잉흐자르갈에게 전화 했더니, 신도들이 오지 않아 오후에나 굿을 하게 될 거라고 했다. 그녀는 크고 작은 약속을 자주 어기지만 웬지 밉지 않다. 이유가 뭘까? 대책없이 그녀의 연락만 기다릴 수는 없어서 지난 해 만나 굿을 했던 화이트 샤먼 수미야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체첸 교수가 알려 준 주소를 들고 물어물어 찾아가니, 지난 해 방문했던 그 아파트가 기억났다. 하지만 정확한 호수를 몰라 한참 헤메야 했다. 결국 독수리 문양의 장식이 붙어있는 그녀의 집을 찾긴 했는데, 안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다. 아마 외출 중인 것 같다. 또한 무작정 기다릴 순 없어 발길을 돌렸다.
정오가 다가오는데도 몽골인들과 만날 약속을 정하지 못한 우리는 체데브 교수를 찾아가 몽골 불교에 대한 인터뷰를 하기로 결정했다. 갑작스런 연락에도 그는 흔쾌히 학교로 찾아오라고 말했다. 자나바즈라 불교대학은 게스트하우스에서 그리 멀지 않은 울란바타르 남쪽에 있었다. 그 주변으로 나담에 참가하기 위해 시골에서 미리 올라온 차들 때문에 교통 혼잡이 매우 심했다.
<울란 바타르 남부 도로의 교통체증>
교문 앞에 체데브 교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학이라고는 하지만 소박한 2층 건물이 부담감 없이 편안하다. 그를 따라 건물 2층의 총장실에 들어갔다. 체데브 교수의 연구실 겸 집무실인 그 방 한쪽에는 주발을 들고 있는 석가모니불의 걸게 그림을 비롯 티벳불교의 여러 신들의 그림과 신상, 의례 도구들로 장식한 신단이 있었다. 석가모니불이 밥그릇을 들고 있는 것은 몽골불교 탱화의 고유한 특성이냐고 물으니, 티벳에도 그런 모습의 탱화가 많다고 한다. 신단 맞은편에는 불경 꾸러미와 종교 관련 책들이 빼곡이 꽂혀 있었다. 지난 번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도 느꼈지만, 학문하는 자리와 신앙하는 자리가 하나로 존재한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말 그대로 거경궁리의 병진일까. 우리는 불교 지식인인 그에게 몽골 불교의 포괄적 상황을 질문했다.
몽골 전체를 아우르는 교단 조직이 있나요?
간단사에서 모든 라마승을 관리합니다. 몽골에서 활동하는 모든 라마승의 명부를 간단사에서 가지고 있습니다.
지원자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야 라마승이 될 수 있습니까?
라마승이 되려는 사람은 자신의 스승을 정해 공부한 후 그 스승으로부터 인정받아야 합니다. 스승이 그에게 자격을 준 후 각 사원별로 새 라마승 명단을 취합해 간단사로 보냅니다.
그러니까 실제적으로는 간단사가 몽골 불교 전체를 아우르는 상급 단체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사회주의 시기에 유일하게 공개적 활동을 허용받았던 간단사는 사회주의 이후에도 여전히 몽골 불교를 대표하는 사원이다. 사회주의 시기의 간단사 라마승들은 정치권력의 허수아비 승려들로 비춰질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대단한 용기와 신념의 소유자들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1930년대의 혹독한 탄압의 기억에도 불구하고, 라마승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추구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결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주의 시대의 간단사가 관제불교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것은 일면적인 폄하일 뿐이다.
하지만 사회주의 이후의 간단사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그것은 몽골 사회를 재구성하고 있는 '시장(market)'과 마찬가지로, 불교 역시 시장주의 논리에 입각한 경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 사원간의 알력과 반감이 존재하는 것도 그 변화를 반증한다.(뒤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사회주의 이후 간단사와 다쉬 초이링 사원의 대립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라마승들과 정부의 관계는 어떤가요?
불교는 자율적 종교단체이므로 정부의 통제 바깥에 있습니다.
사회주의 이전에는 '너무 많이' 정치에 개입했던 몽골 불교 - 사실상의 정교일치 - 는, 바로 그 이유로 끔찍한 억압을 경험한 탓인지 개방 이후에는 정치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인구 대다수가 불교 신자로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 현실과, 또 전통적으로 세속의 정치적 사안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개입해 왔던 몽골 불교의 역사적 성격에 비추어 볼 때 종교와 정치의 밀접한 관계 형성도 가능할 것 같다. 비록 라마승들은 본격적으로 참여하고 있진 않지만 불교 기반의 정당도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보면 몽골 불교의 정치참여가 어떤 형태로 전개될지 궁금해진다.
최근의 몽골 불교에도 홍모파가 존재합니까?
겔룩파만 있습니다.
겔룩파(dge-lugs-pa, 格魯派)는 15세기 경 티벳의 쫑카빠(Tshong kha pa)가 창립한 불교 종파이다. 쫑카빠는 당시 밀교 출가자들의 결혼과 음주 등 문란해질 계율을 새롭게 정비했다. 이 겔룩파 승려들은 노란 모자를 쓴다고 하여 흔히 '황모파(黃帽派)'라고도 한다.
하지만 며칠 전 홍모파로에서 자격증을 받았다는 여자를 만났는데요.
홍모파의 조직이 있긴 하지만 대중적 법회는 하고 있지 않아요.
붉은 모자를 쓴다고 해서 홍모파(紅帽派)로 불리는 '닝마파'는 티벳에 밀교(密敎, Tantric Buddhism)를 전한 파드마 삼바바의 제자들이 세운 종파로, 훨씬 뒤에 나타난 황모파와 오랜동안 대립해 왔다. 히말라야권에서는 아직도 세력이 크지만 몽골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들의 종교의례는 무척 현란하며 승려들도 결혼할 수 있다.
아무튼 우리를 혼란에 빠뜨린 사란다와 때문에라도 홍모파에 대해 더 물어보려는데, 체데브 교수가 갑자기 "목적은 같지만 길은 여러 가지가 있다."며 묻지 않은 이야기를 했다. 순간 나는 몽골 불교에 대한 그의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우리가 종파에 대해 캐묻는 것이 몽골 불교의 분열상에 대한 부정적 시각과 연관된 것이라고 여긴 것 같았다. 그러한 옹호적 태도는 사회주의 시기 겔룩파의 '타락'인 대처(帶妻) 현상에 대한 변호에서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사회주의 때는 아내가 없으면 세금을 더 내야 했으므로 할 수 없이 라마승들도 결혼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라마승들의 '대처' 현상을 종교적 타락으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전통적 겔룩파가 독신을 의무 사항으로 정했던 점에 비추어 보면, 사회주의 시기 겔룩파 승려들의 결혼은 불가피하게 자기 전통의 포기로 평가될 수 있다. 다만 체데브 교수는 그런 현상이 불교 내적 변형 때문이라기보다는 외적으로 강제된 것이라는 데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 불교... 그 복잡한 관계성이 중요한 주제로 부각된다.
사회주의를 거치면서 불교에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사실 큰 변화는 없었어요.
사회주의 때는 공식적 종교행사 대신 신도들과 라마승들이 만나다 보니 점술 같은 행위들이 성행하게 되었다는 평가도 있던데요.
그런 면이 있긴 합니다. 옛날 불교 신도들은 '종교적 지식'이 많았지만, 지금 신도들은 사업 문제처럼 자기가 원하는 복만 바랍니다. 걱정이에요. 불교는 사업이 아닙니다.
불교는 물질적 복만을 추구하는 거래 행위가 아니라는 그의 비판은, 역설적으로 현재의 몽골 불교가 자본주의적 기복주의에 잠식당해 가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복을 추구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 복이 자본주의라는 비정한 시스템을 기반으로 작동하려면 유목민들의 전통적 가치관과 생활방식의 포기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한 예로 자본주의에서 복의 추구는 자연의 부정을 가져올 수도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몽골에 닥친 자연재해의 원인을 라마승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옛날에는 라마승들이 로스-사브다크를 위한 의례를 했고, 또 오트공 텡그리에게도 매우 성대한 의례를 했습니다. 하지만 사회주의 70년 동안 그런 의례를 하지 못했어요. 요즘 다시 의례를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걸 개인적 목적으로만 하고 있어요. 그러니 로스-사브다크가 좋아하지 않는 겁니다. 게다가 사람들이 서로 다투고 서로 나쁜 말을 하면 우주의 변화에 영향을 미쳐 환경을 점점 더 나빠지게 하는 겁니다.
역시 문제는 자본주의이다. 물론 사회주의가 더 나은 삶의 방식과 세계관을 제공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시장경제 이념과 원리의 부정적 측면은 더욱 치명적이다. 로스-사브다크의 불만은 종교적 경건함이 거래 관계로 변질되는 것, 즉 신앙의 상품화에 대한 분노인 것은 아닐까.
<체데브 교수 연구실에서>
체데브 교수는 나담이 끝나면 간단사를 지도하는 라마승을 소개해 주겠다고 약속하고, 영어로 된 티벳불교 관련 책과 상하이에서 나온 [몽장불교사], 그리고 불교 경전을 영역해 놓은 책들을 빌려줬다. 학교 바깥까지 배웅 나온 그와 헤어져 간단히 샌드위치로 점심 식사를 했다. 식사 후 잉흐자르갈에게 전화했더니 오늘 굿이 취소되었다고 한다. 내일 11시에 다시 연락하기로 약속하고 대신 환경단체를 방문할 생각으로 전화했더니 받지 않는다. 몽골에서는 관광서나 단체는 모두 2시까지 쉰다.
공원에서 만난 어윰(76세) 할머니
특별한 계획이 없는 우리는 울란바타르 중심가 아파트 안의 작은 공원을 찾아갔다. 처음엔 그냥 앉아서 쉴 생각이었는데... 담배를 피우고 계신 할머니 한 분을 보자 생각이 달라졌다. '느낌'이 온다. 특히 나이든 분들과의 대화는 많은 영감을 준다. 할머니나 할아버지의 기억에서 몽골인들의 종교와 문화, 역사의 흔적을 찾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과정이다. 우리는 그녀 곁에 다가가 앉은 후 슬쩍 말을 걸었다. "바야르테..."
할머니의 이름은 어윰. 그녀는 아르항가이 아이막에서 10년 전에 이사온 불교 신자다. 어윰이 좋아하는 신은 화이트 타라이다. 하지만 그녀의 다섯 자식은 아무도 종교 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다.(몽골인들이 "나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물상화된 종교 개념을 가진 사회의 사람들이 "나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하는 몽골인들 대부분은 종교는 없지만 로스-사브다크 의례를 하고, 자연과 관련된 전통적 금기들을 지키고, 사원에 가서 복을 빌고, 여행할 때마다 안전을 기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몽골인들 대부분은 비종교적이라기 보다는 물상화된 종교 개념에 오염되지 않은 종교적 경건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그녀는 요즘은 1주일에 한 번 간단사에 가서 기도하고 라마승으로부터 축복받는다.
어윰은 아르항가이 아이막에서 유목을 하다가 기르던 가축을 친척들에게 모두 나눠주고 울란바타르로 이사왔다. 그녀가 이사를 결정한 이유는 늙고 힘이 약해져 더 이상 가축을 돌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미 시골을 떠나 도시로 온 그녀의 자식들과 함께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난 것이다.
사회주의때도 불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 때는 사원을 갈 수 없었어. 집에서도 불교 신앙을 실천하진 않았지.
탄압 때문이었나요?
그렇지 않아. 특별한 탄압은 없었어. 단지 가축을 기르느라 너무 바빠서 신앙을 가질 틈이 없었을 뿐이야.
그녀가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은 사회주의가 끝난 90년대부터이다. 하지만 그녀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역사적 분기점을 신앙을 자유롭게 한 계기로 인정하고 있지 않았다. 물론 그녀 역시 사회주의 때는 간단사 외의 사원들은 공식적으로 활동하지 못했음을 알고 있었다. "그때도 간단사에는 노인들만 갔다고 해." 그녀의 회고는 외부자가 생각하듯 사회주의 정부의 종교 탄압이 그렇게 극심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신앙이 위축된 까닭이 '바빠서'라는 것은 사회주의의 '생산력주의'와 무관하지 않겠지만 직접적 탄압은 경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종교에 대한 사회주의 체제의 부정적 역할이 직접적 억압으로 나타나지 않았다는 진술을 여러 몽골인들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물론, 초이발산 등 몽골 내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된 1930년대의 혹독한 탄압과 학살은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몽골 사회를 지배하던 불교가 그 조직력을 상실하고 더 이상 사회주의 권력에 위협이 될 수 없었을 때부터는 '캠페인' 수준의 방해는 있었어도 더 이상 야만적 탄압은 없었다는 분석들이 있다.
고향에서 가축을 기를 때 초원 상태는 어땠어요?
좋았지.
밧조릭은 몽골사람들은 "나빴다."고 이야기하지 않는 습관이 있다고 보충했다. 대화 중에 계속 생겨나는 의문... 의문은 인간에 대해 탐구적 자세를 갖게 한다. 그래서 사소히 지나쳐도 좋은 인간은 없다.
사회주의 때는 가축들을 소유할 수 없었나요?
아니. 그 때도 우리 가축을 길렀어.
그럼 정부로부터 불이익을 받았다고 하던데요.
그렇지 않아. 그런 적 없어.
밧조릭은 유목민 대부분은 정부의 가축과 자기 가축을 동시에 길렀다고 설명해줬다. 그것은 엄밀한 의미의 사적 소유 개념은 아니다.
가축을 기를 때 자연에 대한 어떤 종교적 금기사항 같은 것이 있었어요?
특별히 그런 것은 없었어. 그냥 자연을 사랑하며 살았지. 양과 가축들도 풍부했어. 물론 어워 의례는 있었어. 내 부모들은 설날이면 어워를 돌면서 '건강'을 기원했어.
'건강'을 기원했다는 말이 흥미롭다. 밧조릭은 가축의 풍요가 아니라 '건강'을 기원한 까닭은 사회주의 때는 배급 체제였기 때문에 생산을 증대해도 온전히 자기 것이 될 수 없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니 생산 증대보다는 개인의 건강이 더 중요한 기원의 내용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파트 단지 내 공원에서 어윰과 그녀의 아들>
잠시 후, 그녀를 모시고 사는 아들이 왔다. 알고보니 그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공장에서 경비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어떤 경계심도 보이지 않고 웃는 낯으로 인사했다. 우리는 할머니에게 "건강하세요!" 인사하고 공원을 떠났다.
다쉬 초이링 사원
우리는 일정을 바꿔서 다쉬 초이링 사원을 방문하여 신자와 승려들을 무작정 만나보기로 했다. 뜻밖의 '인연'으로 몽골인들의 내면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기를 막연히 기대하며...
<다쉬 초이링 사원 현판>
<법회를 알리는 누각>
<사원 내 법당 지붕>
월요일이지만 사원에는 나이든 노인들과 젊은이들이 계속 찾아오고 있었다. 프레이어 휠을 비치해 놓은 작은 건물에 깔끔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중년의 몽골인과, 세련된 양장 차림의 젊은 여성이 크고 작은 기도통을 돌리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 자본주의 몽골에 연착륙한 삶을 살고 있어 보이는 그들이 그 시간 일부러 사원을 찾아와 기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경전 휠에는 기원을 담은 쪽지들이 붙어 있다.>
<작은 경전 휠을 돌리는 남자>
<경전 휠을 돌리는 사람들>
사원 사무실에서는 자신들의 문제와 희망에 맞는 경전을 신청하는 사람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법당에 들어갔더니 한쪽에서 젊은 여성 한 명과 두 명의 할머니, 그리고 젊은 라마승 하나와 나이든 라마승 한 명이 참(Tsam) 댄싱을 위한 옷을 만들고 있었다.
<법당 내부>
<참 옷을 재봉질하고 있는 신도>
전통적 티벳불교의 종교적 춤인 '참'은 새, 동물, 노인, 불신(佛神), 악마, 티벳인 등 여러 형태의 가면을 쓰고 악을 물리치고 신을 달래며 사람들의 복을 빌어주는 여러 과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겉보기에는 무시무시하고 커다란 탈을 쓰고 추는 이 참은 모든 몽골 사원들에서 중요한 의례이다. 다쉬 초이링 사원에서도 참을 7월 29일 에 열기로 예정하고 있었다. 우리는 참을 준비하고 있는 몇 명의 몽골인들과 짧은 대화를 나눴다.
도더르(여, 73)
<장식을 만들고 있는 도더르>
참 의상에 붙일 천 조각을 만들고 있던 도더르 할머니는 1주일에 두, 세 번 정도 사원에 나오는 열심 있는 신도다. 그녀는 참 옷을 만드는 것을 따로 배우지는 않았지만, 이번 해 6월부터 그 일을 돕고 있었다. 도더르가 불교 신자가 된 것은 1990년부터라고 한다. 하지만 그녀가 1990년 이전에는 비종교적 인간이었을 것 같지는 않고, 사회주의 이후 종교적 실천과 표현을 더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신은 아리아와트다. 옆에 있던 젊은 라마승 간바트는 그 신은 부처님의 심장을 의미한다고 설명해줬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신에게 건강하게 오래 살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녀의 주름진 얼굴이 평화롭게 보이는 것은 신과의 사랑 때문일까.
간바트(22세, 라마승)
젊은 라마승 간바트는 우브르항가이 아이막 출신이다. 그는 6년 전에 부모의 뜻을 따라 라마승이 되었다. 지금은 사원 행사에 필요한 초나 옷같은 여러 가지 물품들을 만들고 준비하는 직책을 맡아 일하고 있다.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면서도 계속 일에 분주한 그를 붙잡고 긴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다쉬도르츠(93세, 라마승)
함께 있던 노 라마승 다쉬도르츠는 참 옷 만드는 일을 지도하고 있다. 동(東) 고비(Gobi) 아이막 출신의 그는 5살 때 라마승이 되었지만, 사회주의 때는 의류 공장에서 일했다. 울란바타르로 이사온 것은 1943년이었다. 가족이 병들어 고치러 왔다가 도시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참 옷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2년 전부터이다. 다쉬도르츠는 사회주의 때 종교적 활동을 할 수 없었다고 회고한다. 상자를 뒤적이며 작은 불상 등 여러 가지 소품을 꺼내는 그는 자기 집에도 사회주의 때에 몰래 숨겨놓은 불상들이 있다고 말했다.
스치듯 만난 세 사람의 몽골인들. 그들과의 만남은 많은 정보를 주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상이 흥미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불과 몇 분 동안의 대화를 통해 삶을 전환시키는 강렬한 만남도 있지만 가는 비에 젖듯 서서히 느낌을 주고 받는 만남도 있다. 한참 바쁜 사람들 붙잡고 시간을 빼앗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 여긴 우리는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다.
법당 밖으로 나와 사원 경내를 한가로이 거닐다가 아까 사원에 들어올 때 같이 들어온 할머니 한 분이 수풀 사이에서 주무시고 계신 것을 발견했다. 대낮에 그렇게 꾸부정한 모습으로 잠드신 것이 안쓰러웠지만, 그녀는 육신과 마음에 배인 고단함을 모두 내려놓고 편안히 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원 뜰에서 주무시는 할머니>
뜰 한 쪽에는 하얀 나무기둥에 푸른 하닥과 티벳어로 불경을 인쇄해놓은 천이 놓여 있었다. 별 특별한 기둥은 아닌 것 같은데 사람들의 신앙이 표현되고 모여지니 사뭇 성스러운 상징으로 보여졌다.
<하닥과 불경으로 감아놓은 기둥>
<사원 경내>
신도들에게서 불경 신청을 받는 사무실에 갔더니 알탄 쿠라는 젊은 라마승이 관심을 보이며 능숙한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알탄 쿠와는 이후 몇 차례 더 만나 흥미로운 대화를 나눴다.)
<불경을 신청하는 사람들>
<불경 신청서를 접수하는 라마승>
지금 하는 일은 뭔가?
신도들이 자신의 일과 삶에 행운이 있기를 기원하며 읽어달라는 불경을 신청 받는다. 그러면 다른 라마승들이 그것을 읽어 준다.
신도들은 돈을 내는데...
정해진 것은 아니다. 돈을 내도 좋고 안 내도 좋다. 신청하면 다 읽어준다.
그의 말을 듣고 불경읽기표를 보니, 간단사와는 달리 불경 옆에 가격이 써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불경을 신청하는 신도들 대부분은 자연스럽게 돈을 함께 내고 있었다. 이처럼 자신의 복을 바라는 사람들이 '공짜'로 그것을 받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은데, 굳이 가격표를 만들어놓은 간단사의 의도가 궁금하다.
지난 해 왔을 때완 달리 사원이 비교적 한가한 것 같다.
원래 100명 이상의 라마승이 있는데 요 며칠 동안 복드항 산 순례를 떠났다.
100명? 꽤 많다. 당신 같은 젊은 사람들이 많이 지원하나보다.
그렇다. 하지만 지원자 모두를 다 받아주지는 않는다. 사원의 수용 인원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다쉬초이링 사원에는 간단사와 비교되는 흥미로운 점들이 많은 것 같았다. 두 사원을 집중적으로 방문하여 신도들과 라마승들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주 찾아가다 보면 몽골인들의 종교성을 더 깊이 알게 해 줄 '문(門)' 같은 이들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수흐바타르 광장에서의 토론
<수흐 바타르 상>
태양이 작열(灼熱)한다. 미리 약속해서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관찰하는 것도 힘들지만, 특별한 예정 없이 무작정 사람들을 찾아 다니고 말 걸고 하는 것도 꽤 피곤하다. 그건 '말걸기'에 대한 반응이 어떤 것일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의 망설임이 주는 지독한 긴장 때문이다. 그래도 몽골인들은 낯선 이방인의 접근을 그다지 싫어하지 않는다. 서울에서 누가 갑자기 내게 "신앙이 있어요?"라고 물으며 다가오면 한 번 강하게 '째려 보고' 말없이 내 길로 갈 것 같은데, 오랜 시간을 두고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지 못했어도 오늘 만난 몽골인들은 우리를 호의로 대해줬다.
그런 호의는 유목민들의 생활 양식이 형성한 '환대(hospitality)'의 문화와 관련된 것 같다. 아직 유목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시골 지역에서는 정중한 환대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지난 해에 북부 헙스걸 아이막과 중부 지역의 시골에서 경험했던 따뜻한 인정(人情)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스스로 손님을 맞는 주인인 동시에 나그네일 수밖에 없는 유목적 삶의 원리가 "네가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인간 관계의 황금률을 내면화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더 이상 '말 걸기'의 긴장상태를 지속할 수는 없어서 필드워크 일정을 멈추고 밧조릭과 헤어졌다. 위도상 해가 늦게 지는 지역이라 늦은 오후인데도 햇빛이 강렬하다. 수흐바타르 광장의 동상 옆 벤치에 앉아 쉬는 데 한 무리의 몽골인 고위장교들이 웃음을 터트리며 사진을 찍고 있다. 나담에 참여하기 위해 지방에서 올라온 장교들인 것 같은데 여성 장교들도 꽤 있었다. 그 모습이 당당해 보여 좋다.
그들을 보니 간밧이 들려 준 몽골 군대 이야기 생각났다. 몽골도 징병제이지만 복무 기간이 1년이고, 또 어느 정도 '있는 집'(?) 청년들은 군대를 안 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군대 가는 사람들은 가난하거나 수완 없는 사람들 뿐이라고 한다. 어디서나 '쫄병'과 '가난한 사람'은 살기 고달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