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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0 15:43

프롤로그: 시카고에서 멜버른까지

1893년, 미국 시카고에서 세계박람회가 열렸습니다. 짧은 역사의 열등감을 가진 신흥국가 미국이 정치, 군사, 경제, 문화적 힘을 과시함으로써 국제사회의 중심이 되고자 마련한 자리였습니다. 당연히 미국 사회의 정신적, 영적 주춧돌을 놓았다고 자부하는 그리스도교가 빠질 리 없었지요. 그리스도인들은 세계 여러 종교들의 지도자들을 초청해 '세계종교의회(The Parliament of World's Religions)'를 개최합니다. 미국이 세계박람회를 통해 자신의 지도력을 주장하려 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세계종교의회를 통해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을 '국제적으로' 선포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사태는 정복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의 의도와 전혀 다르게 돌아갑니다. 열등하다 여겼던 비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들이 실은 그리스도교에 결코 뒤지지 않는 영적 깊이와 아름다움을 갖고 있음을 '국제적으로' 확인하게 된 겁니다. 결국 1893년 세계종교의회의 최대 수혜자들은 그리스도교와 결탁한 서구 제국주의가 타자화하고 왜곡했던 비-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어쩌면, 세계종교의회를 주최했던 그리스도인들이 다음 모임을 구상, 주도하지 않은 건 당연한 일입니다. 득 될게 없었으니까요. ^^



 


100년 뒤, 1993년, 같은 장소인 시카고에서 2차 세계종교의회가 열렸습니다. 이때에도 서구 그리스도인들이 의회 준비 및 진행에서 중심 역할을 하긴 했지만, 최소한 '
드러난' 서구/그리스도교 패권주의는 없었습니다. 그보다는, 한 종교, 한 나라만으로는 감당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전지구적 차원의 문제들에 대해 응답하기 위한 종교간 대화와 협력이 중심의제였지요. 특히 한스 큉이 주도하여 작성한 [지구윤리를 향한 선언]이 40여 종교전통의 200여 지도자들의 서명과 함께 승인, 채택됩니다. 그 후, 5년 주기로,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1999), 스페인 바르셀로나 (2004년)에서 열린 세계종교의회는 지구적 현안들을 해결하기 위한 종교인들의 지혜를 모으는 만남으로 진화해왔습니다.

 

인류와 지구의 위기가 더 깊어진 시대, 2009년 12월 3일부터 9일까지 호주 멜버른에서 열린 5차 의회는 지구공동체가 직면한 사회적, 윤리적 문제들을 중심적으로 다루었습니다. 이번 의회의 대주제는 "다른 세계를 만들자: 서로에게 귀 기울이며, 지구를 치유하자"였습니다. 이 대주제 아래, 100여 나라, 200여 종교전통에서 온 6천 여명의 종교인들은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 핵심 주제들을 구체적으로 논의했습니다: "돌봄과 관심으로 지구를 치유하기," "원주민들과 화해하기," "가부장제 세계 속의 가난을 극복하기," "마을과 도시에서 사회적 통합을 만들기," "내적 평화의 지혜를 나누기," "모든 인류에게 식량과 물을 보장하기," "정의추구를 통해 평화를 만들기." 


'사
회참여적 종교대화/불교-그리스도교 대화'를 연구하고 있는 제가 세계종교의회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 건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하지만 여러가지 사정으로 참석하는 걸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도교수인 폴 F. 니터 선생님이 직접 경비까지 마련해주시며 꼭 참석할 것을 권하셔서 부담 반, 설렘 반으로 멜버른행을 결정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헨리 루스 재단이 지원한 '다종교사회의 종교지도자 교육' 프로그램의 일부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7일 간의 세계종교의회에 참석하면서, 니터 선생님이 왜 그토록 저를 데려가려 하셨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 종교의 밝고 어두운 '모든 것'이 있었습니다.

물론, 2009 세계종교의회의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건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을 겁니다. 하여, 제가 직접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스케치하듯 풀어 보겠습니다. 일상의 틈바구니 속에서 잊어버리기 전에. ^^ 
  


12월 1일, 2일: 뉴욕/샌프란시스코/태평양

멜버른에 함께 가게 된 친구 마키토와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에서 샌프란시스코 행 비행기를 기다리다 사미어와 라펠을 만났습니다. 두 사람도 세계종교의회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사미어는 뉴욕에서 종교대화 공동체인 '
신앙의 집(Faith House)'을 이끌고 있는 이입니다. 공부와 일 때문에 알고 지내오긴 했지만, 아주 가깝다고는 할 수 없는 사이였지요. 라펠은 처음 만났는데, 알고 보니 같은 리버사이드교회 교인이었습니다. 워낙 교회가 크다 보니, 같은 리버사이더들이어도 서로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 아무튼, 다소 피상적인 인사말을 나누고 제 자리로 돌아왔지요. 

탑승 시간이 되어 줄에 섰는데, 갑자기, 사미어가 당황한 얼굴로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여권과 항공권을 못 찾겠다는 겁니다. 처음엔, 금방 찾겠지 하는 생각에, 또 안심도 시킬 겸, "
기도해줄까요?" 라고 농담을 던졌습니다. 사미어도 웃으며 "플리즈!"라고 답했지요. 그런데, 다른 승객들이 모두 들어간 다음에도 사미어는 여권과 항공권을 찾지 못하는 겁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그는 저더러 먼저 타라고 했습니다. 어찌 그럴 수 있나요? 저는 사미어 옆에 앉아, 그가 이미 찾아 본 서류 파일들 사이를 다시 꼼꼼히 살펴 보았습니다. 다행히 가방 깊숙이 들어 있던 여권과 항공권을 찾았습니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서로 환히 웃는 순간, 우리는 그저 '알고 지내던 사이'에서 '친구 사이'가 되었습니다.  ^^ 기분 좋은 출발입니다.


뉴욕->샌프란시스코->시드니->멜버른... 스물 일곱시간... 날고, 날고, 또 날았습니다. ^^




12월 3일: 멜버른/개회식

시드니에서 멜버른으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는데, 벌써부터 공기가 사뭇 종교적입니다. ^^ 세계종교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종교인들의 숨결 때문입니다. 미국의 진보적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짐 월러스 등 유명인사들도 몇 명 보이네요. 

드디어, 시드니에서 한 시간 가량 날아 도착한 멜버른.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해안선이 힘차게 느껴집니다. 아, 깊고 푸른 바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스카이버스를 타고 숙소인 Urban Central로 갔습니다. 유스호스텔인데, 깨끗하고 젊은 분위기가 맘에 듭니다. 단, 숙박비는 만만치 않네요. 네 사람이 함께 자는 방에 1인당 30달러. 간단한 아침식사를 무료로 제공하는 건 좋네요.   

오랜 비행에 굳어진 몸도 풀고 도시와 친해질 겸 잠깐 주변을 둘러 보았습니다. 초여름이라지만 선선하네요. 멜버른, 일단은 깨끗한 인상의 도시입니다. 
 



오후 5시. 유니언에서 온 동료 학생들, 폴 니터 선생님, 부인 캐씨와 함께 한 푸드코트에서 저녁식사를 곁들여 첫모임을 가졌습니다. 마키토와 저 말고는 모두 전날 도착해서 그런지 한결 여유가 있어 보입니다. 내일부터 각자 혹은 함께 참여할 프로그램들에 대한 정보도 나누고, 정기적 토론 시간도 정했습니다. 아래 사진에서 니터 선생님이 펼치고 계신 책은 프로그램 안내 책자입니다. 무려 395페이지! 크고 작은 650여 행사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들어 있습니다. 7일간 그 친구를 들고 다니느라 어깨가 뻐근했다는. ^^ 




멜버른 물가... 깜짝 놀랐습니다. 뉴욕보다 모든 게 비쌉니다. 말이김밥 '작은' 거 두 개와 우동을 시켰을 뿐인데 거의 20달러입니다. 한 친구가 푸념 섞어 한마디 합니다. "돌아가면 '뉴욕 물가'가 싸게 느껴질 것 같아." ^^  

식사를 마치고 개회식에 참석하기 위해 야라(Yarra)강 강변의 [멜버른 엑시비션&컨벤션 센터]로 갔습니다. 새로 지은 건물입니다. 안팎의 모양도 아름답지만, 생태친화적 시설이 돋보입니다. 앞으로 7일간 세계종교인들의 마음을 담아낼 공간입니다. 






대회의장 앞에서 식전행사가 한창이네요. 힘찬 북소리에 맞춰 금강선국제총회(金剛禪國際總會) 스님들이 역동적 탈춤을 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님들의 절도 있는 춤사위가 다소 '군사적' 느낌을 주어 부담스러웠습니다. 소림사(少林寺)스럽다고 할까요? ^^  생각해보면 중국 선불교의 중심 사찰인 소림사에서 무예가 발달했다는 사실이 참 이상합니다. 불교의 비폭력 이상과 무예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 건지... 무예를 수행의 한 방편으로 삼은 거라는 설명도 있지만, 그보다는, 소림 무예의 기원이 사원의 '소유' 때문이라는 설명이 역사적 사실에 더 가까운 같습니다.
그러니까, 점차 소림사의 재산이 늘어나면서, 그것을 지킬 필요에 따라 일종의 승병을 만들었다는 거죠. 그렇다면, 진짜 근원적 문제는 무예의 도입이 아니라 무소유의 이상을 저버린 불교의 역사적 현실에 있을 겁니다. 

뭐, 그래도 멋있긴 하지만...
^^

개회식은
1893년 시카고에서 2004년 바르셀로나까지의 세계종교의회의 역사를 보여주는 영상물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로얄 필하모닉 합창단과 오케스트라가 웅장한 시작을 알렸지요. 그런데, 넓은 대회장을 압도하듯 채우고 있는 '서양 음악' 틈새로 거칠고 묵직한 소리 하나가 끼어듭니다. 앨런 해리스(Alan Harris)가 호주 원주민의 전통악기인 디저리두(didgeridoo)를 연주하는 소리였습니다. 처음에는 불협화음처럼 어색하고 조금은 외롭게 들리더니, 차츰 제 음색을 내면서 화음을 이뤄갑니다. 바람 같은 그 소리, 깊고, 자유롭고, 당당했습니다  




호주 원주민들을 대표하여 우룬제리(Wurundjery) 부족의 여성 원로인 조이 머피-완딘(Joy Murphy-Wandin) 교수가 기품있고 따뜻한 환영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개회식 순서 참여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
배움의 나뭇잎" 하나씩을 환대의 표시로 나눠주었습니다. 서로에게 배움으로써 더 깊고 넓어질 것을 축원하면서...




조로아스터교,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 시크교,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 바하이, 원주민 종교, 신도의 대표들이 나와 축원하는 순서를 가졌습니다. 이들의 축원은 라비 쉥커(Ravi Shanker)의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종교의 목적은 개인에게 깨달음을, 사회에는 행복을 주는 것입니다."




개회식의 주요 연설자들은 한 목소리로 종교의 사회적, 윤리적 책임성을 강조했습니다. 지난 5년 간 세계종교의회를 이끌어 온 의장 윌리엄 레셔(William Lesher) 박사는 종교인들이 나서서 마틴 루터 킹 목사가 꿈꿨던 '사랑의 공동체(Beloved Community)'를 만들자고 촉구했습니다랍비 데이빗 새퍼스타인(David Saperstein)도 종교의 사회적 책임성을 강조하는 인상적인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우리는 지구상의 모든 인류에게 공급하기에 충분한 식량을 생산하는 첫 세대입니다. 우리가 그것에 실패한다면, 그것은 곧 도덕적 비전과 정치적 의지의 실패입니다."    




그렇게, 많은 종교, 한 희망의 축제가 막을 올렸습니다. 개회식이 끝나고 친구들과 밤거리를 산책하다, 구름 사이로 나타난 밝은 달을 보았습니다. 어제 태평양을 건너며 보았던 같은 달입니다. 문득, 선불교의 '손가락과 달의 비유'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언어(손가락)에 집착하지 말고 진리(달)를 보라는 가르침이지요. 달이 자신을 가리키는 많은 손가락들을 차별없이 환하게 비춰주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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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한 | 2010/01/21 18:12 | PERMALINK | EDIT/DEL | REPLY
드디어 제가 기다리던 글이 올랐군요.
잘 읽고 많은 사실들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다음 글들이 더욱 기대되는군요.
같은 호주 내에 산다고 하지만, 시드니에서 멜번까지 자동차로 12시간 거리랍니다.^^
BlogIcon 정경일 | 2010/01/22 08:46 | PERMALINK | EDIT/DEL
기다려주시고, 공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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