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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7 07:25


늘 하는 불교 수행법 중에 ‘걷기명상(walking meditation)’이 있습니다. 틱낫한 스님을 통해 널리 알려진 이 걷기명상은 말 그대로 ‘걸으면서 하는 명상’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걸으면서 하는 명상이라기보다는 걷는 것을 명상으로, 수행으로 삼는 것이지요. 나는 내가 지금 걷고 있음을 마음챙겨 알아차리면서 천천히 걷습니다. 들숨 하나에 한 걸음, 날숨 하나에 또 한 걸음, 미소를 지으며, 마치 처음 걸어보는 것처럼, 느리게, 고요하게, 평화롭게 걷습니다. 그리고 자각합니다. 그 걸음 하나하나가 나라는 것을...

걷기명상의 매력은 그 수행의 장소를 선방(禪房)으로 제한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나지막하고 평화로운 목소리로 틱낫한 스님이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길, 모든 거리가 걷기명상을 위한 길입니다.” 활동하면서도 고요와 평정을 잃지 않는 걷기명상은 세상 밖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세상을 넘으려는 수행자들에게 큰 도움과 힘을 주는 수행법입니다. 마음챙겨 걸을 때 걷기가 명상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마음챙겨 하는 다른 모든 활동도 명상이고, 기도며, 수행인 것이지요.

이 걷기명상을 할 때마다 내 몸의 세포들이 일깨워주는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처음 걷기명상을 배우던 날, 나는 선방 안으로 부드럽게 들어와 길게 누운 하오(下午)의 햇살을 밟으며 천천히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걷기명상의 움직임이 무척 익숙하게 느껴졌습니다. 마치 내 몸 어딘가에 걷기명상과 비슷한 움직임의 경험이 저장되어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나는 그것을 바로 기억해내지 못했지만, 아마도, 느리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경험일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풀밭 위를 걷다가 문득 알아차린 그 익숙함의 실체는, 어이없게도, 어린 시절 ‘참새 사냥’의 기억이었습니다.

아마 아홉 살 무렵의 어느 여름날이었을 겁니다. 나는 집 가까이 둑방 아래 너른 풀밭으로 참새사냥을 하러 나갔습니다. 수십 번 돌을 던졌지만 이리저리 잘도 피하는 재빠른 참새들을 도무지 잡을 수 없었습니다. 팔이 뻐근하게 아파 올 때쯤 기발한 생각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허수아비 시늉을 해보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수풀 속에 꼼작도 하지 않고 팔을 벌린 채 서 있었습니다. 부드럽게 얼굴을 어루만지는 햇살, 풀잎을 가볍게 흔드는 바람소리... 평화롭고 고요했지요. 완전한 평정(平靜)이었습니다.

드디어, 참새 한 마리가 가까이 날아와 앉더니 주위를 살피며 풀씨 따위를 쪼아 먹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한참을 더 꼼짝 않고 서 있다가 그 참새를 향해 천천히, 소리 없이 다가갔습니다. 그리고는, 있는 힘껏 돌팔매질을 했고, 돌을 맞은 참새는 땅 위로 툭 쓰러졌습니다. 나는 신이 나서 달려가 퍼덕거리고 있는 참새를 덥석 움켜잡았습니다. 하지만, 충격 속에 반쯤 감긴 눈으로 부리 주변에 피를 흘리고 있는 참새의 심장 박동을 손바닥으로 느끼는 순간 내 기쁨은 죄책감으로 바뀌었습니다. 
 
나중에 기력을 회복한 참새를 날려 보낸 후에도 죄책감은 남았고, 그 기억이 흐릿해질 즈음 죄책감은 내 몸 어딘가에 저장되었습니다. 그렇게 몸 안에 저장되어 있던 죄책감이 오랜 세월이 지나 걷기명상을 할 때 불쑥 되살아난 것이었지요. 내가 느꼈던 익숙함의 정체를 기억하면서 명상도 남을 해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티벳 불교 학자이자 수행자인 로버트 써먼은 “무지한 이가 지혜는 닦지 않고 열심히 명상만 하면 무지가 더 깊어진다”고 했지요. 같은 이치입니다. 폭력심에 물든 이가 자비심은 기르지 않고 열심히 명상만 하면 폭력심이 더 강해질 뿐입니다.

수행자들이 증오를 부추기고 폭력을 휘두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지난 세기 일본의 선사(禪師)들이 군국주의 전쟁을 찬양하며 협력했던 것, 한국의 승려들이 종단 내 폭력사태로 물의를 일으켜 왔던 것, 그리고 독실한 불자와 그리스도인들이 이른 새벽 명상하고 기도한 후 더욱 예리해진 정신과 집중력으로 지배체제의 유지와 강화를 위해 일하는 것은 모두 자비 없는 수행의 폐해들입니다. 그런 자비 없는 수행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해롭기까지 합니다.

내게 걷기명상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쳐 주는 것은 세상 속에서 자비로운 마음으로 평화와 정의를 위해 행진하는 이들의 걸음입니다. 1965년 3월 21일, 미국 앨라배마 주 셀마시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 등과 함께 흑인민권운동 행진에 참여했던 랍비 아브라함 죠슈아 헤쉘이 뒤에 킹 목사에게 편지를 씁니다.

“우리에게 그 행진은 저항이며 기도였습니다. 물론 다리는 입술이 아니고 걷는 것은 무릎 꿇는 것이 아니지요. 하지만 우리의 다리가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말없이도 우리의 행진은 예배였습니다. 나는 내 다리가 기도하고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평화와 정의를 위해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기도이고 명상입니다. 나는 걷기명상을 할 때마다 그 작은 참새의 심장박동을 느끼며 자비심을 기릅니다. 그리고 자신과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행진하는 ‘수행자들’의 행진이 일으키는 진동을 느끼며 세상 속으로 걸음을 옮겨야 함을 자각합니다. 내 수행의 장소인 세상 속으로, 한 걸음 평화를 위해, 한 걸음 정의를 위해, 느리게, 고요하게, 자비롭게...


1965년 3월 21일 마틴 루터 킹 등과 함께 셀마에서 행진 중인 아브라함 죠슈아 헤쉘(오른쪽에서 두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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