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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31 23:06

정경일 (새길기독사회문화원 간사)


 

나의 기억 속에는 지금도 20년 전 부산 송도의 바닷가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울던 초라한 신학생 하나가 있다. 그저 평범한 신학생에 불과한 내가 그때 왜 그렇게 몸살을 앓고 있었던 것일까? 비록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곳이지만 내가 살고 있는 나라의 한 도시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 갔다는 사실 앞에서, 나 또한 깊은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 문부식

깊은 상처 속에서 본회퍼를 떠올린 문부식은 “예외적인 시대에는 예외적 행동을 해야 한다.”는 확신으로 후배들과 함께 1982년 3월 18일 부산 미문화원을 방화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동아대 학생 장덕술이 죽은 것은 지울 수 없는 죄의식으로 남았다. 그는 법정에서 무죄를 주장하지 않았고 6년 9개월의 긴 옥살이 동안 한 번도 억울해 하지 않았다. 반미 전사라기보다는 방화범을 자처해 온 문부식은 “남은 인생의 행복은 다른 사람들의 반(半)이어야 한다.”고 자책해 왔다. 그와 동료들이 20여년 전의 사건에 대해 민주화운동 인정 신청을 하지 않은 것도 죽음과 연루된 자들이 보여야 할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젊은 날의 상흔을 응시하며『당대비평』에 ‘드문드문’ 성찰적 글쓰기를 해온 문부식은 2002년 하반기 가장 치열한 논쟁의 주인공이 되어 있다. ‘동의대 사건’ 민주화운동 인정 과정의 문제를 제기한 인터뷰가〈조선일보〉에 실린 그해 7월 이후, 그리고 그의 책『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광기의 시대를 생각함』이 출간된 후에 ‘문부식 논쟁’은 더욱 확산되고 있다. 이처럼 반 년 가까이 논쟁이 지속되었던 것은 그의 성찰이 매우 복합적인 사유를 포함하기 때문이지만, 그가 재생시키는 또 다른 시선과 기억이 우리에게 매우 ‘위험하고’ ‘불편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글을 읽으며 80년대의 기억으로 한바탕 몸살을 앓은 뒤, 문부식을 만났다.


적의를 넘어서는 용기

우리 안에 존재했던 폭력부터 성찰해야 국가 권력의 폭력을 제대로 성찰할 수 있다는 말은, 국가폭력에 모든 상황의 원인을 돌리면서 자기 성찰을 간과해 온 지금까지의 생각 방식을 전환해 보자는 제언이다.-『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광기의 시대를 생각함』중에서

실존적 아픔이 깊게 배인 그의 성찰은 상품화된 후일담으로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 안의 폭력을 성찰하자는 주장은 국가폭력의 심각성을 간과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지난 해 대우자동차 부평 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경찰의 폭력을 80년 5월의 폭력과 다를 것 없는 야만이라고 비판하는 것을 보면, 그가 국가폭력을 가벼이 여기는 것 같지는 않다. 그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국가폭력이 압도적이므로 그것을 먼저 비판해야 한다는 것은 순서론입니다. 나도 반대의 순서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폭력과 저항폭력은 원인과 결과의 층위가 다르므로 비대칭적으로 설명해야 하지만, 폭력은 동시적으로 성찰해야 합니다. 특히 책임의 문제에 있어서는 이중 기준을 적용해선 안 됩니다. 무엇이 먼저다 하는 순서론에 빠지게 되면 우리는 성찰할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하지만 폭력 자체의 문제를 제기한 것은 근본주의적이고 종교적인 비폭력주의라는 비판도 있었다. 

“폭력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과거에 우리가 폭력혁명론으로 읽었던 프란츠 파농의 사유는 피식민지인들이 폭력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갔을 때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는, 즉 타자화된 자신의 모습을 주체적인 인간으로 전환시키는 지점으로서의 폭력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나도 마지막 발언의 매체로서 총을 잡을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는 걸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부식이 말하려는 것은 비폭력‘주의’가 아니라 어떤 순간에도 우리가 잃어서는 안 될 ‘적의를 넘어서는 용기’에 대한 것이었다.

“어쩔 수 없는 폭력의 순간에도 내 총에 맞아 죽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과 적군의 시체를 발로 뻥뻥 차고 다니는 사람은 결코 동일할 수 없습니다. 총을 들 수밖에 없는 때에도 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상실했을 때 폭력은 단순한 명령어가 되고 맙니다.” 

그가 ‘우리 안의 폭력’을 성찰하자는 것은 ‘광기의 시대’를 지나면서 진보 운동 역시 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잃어버렸다고 보기 때문이다. 문부식이 ‘5․3 동의대 사건’ 민주화 운동 인정 과정을 비판한 것은 공공 영역에서의 논의와 진상규명이 더 필요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정말 묻고 싶었던 건 7명의 경찰이 희생된 그때의 폭력이 정말 피할 수 없는 것이었는가였다. 그리고 ‘그래도 아직은 살아 있는’ 우리는 희생자들을 먼저 배려했어야 하지 않냐는 것이었다. 그것은 후배들을 비판하며 몸과 마음이 다 아팠다는 그, 2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 속에서는 부산 미 문화원 앞을 서성거리며 괴로워하고 있는 그 자신에 대한 물음이기도 했다.

“시대의 불가피성이 있었다 해도 내가 좀 더 신중했다면 장덕술은 죽지 않았을 겁니다. 내 조급함 때문에 그가 죽었고 후배들 역시 깊은 상처를 갖게 되었습니다.”

폭력으로 폭력을 극복할 수 있을까? 수백 만의 목숨을 위협하며 반테러 전쟁을 감행하는 부시는 불과 수십 명의 모의로 WTC가 ‘그라운드 제로’가 되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 폭력으로는 그 누구도 완전히 굴복시킬 수 없다. 박노자가 문부식의 성찰을 진보의 ‘진보’라고 평가하는 것은, 폭력이 아닌 길을 모색하는 것이 정치적으로도 현실주의적일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인류사의 비극은 저항의 물리력보다 억압의 물리력이 압도적이었다는 점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비극 속에서도 한 걸음씩 나아올 수 있었던 것은 반드시 이기겠다는 승리주의보다는 지더라도 아름다움의 편에 섰던 사람들, 져도 싸우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멕시코 치아파스 주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싸우는 사파티스타의 마르코스는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라고 했습니다.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의 운동은 인간의 소통과 공감에서 오는 단호함과 설득력에 기초해야 합니다. 언젠가 수입개방 반대운동을 펼치면서 카드섹션을 하는 여성 농민들을 보면서 확실히 여성적 상상력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항도 축제가 될 수 있습니다. 싸우는 자들이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 줘야 합니다.”


1980년 5월 광주 - 희생자들의 시선

“5.18 특별법의 목적 조항은 ‘국가기강 확립’, ‘민족정기 함양’ 같은 문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광주를 진압하던 전두환의 담화문과 다를 게 없습니다. 결국 국가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죠.”

하지만 과거 청산 과정에서 어느 정도 국가화는 불가피하며, 역사적 계몽의 효과 또한 있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국가는 배상할 의무가 있고 그것을 함으로써 국가의 민주화를 일정하게 이뤄낼 수 있음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국가가 기억과 의례를 독점하게 내버려둬서는 안 됩니다. 과거의 민주화 운동을 국가가 자의적으로 선별하고 규정한다면 소외된 사람은 더욱 소외되고, 그때 죽어간 사람들과 우리의 거리를 생각하며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것도 사라집니다. 결국 악을 저지른 신군부만 처벌하면 과거를 청산할 수 있다고 믿게 되죠. 청산이라는 말은 폭력적입니다. 외상장부 정리하듯 과거도 청산할 수 있는 겁니까? 우리는 과거를 끊임없이 기억함으로써 오늘의 삶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지금까지 광주를 기억하는 방식은 ‘폭동’과 ‘항쟁’이라는 두 극단이었다. 문부식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광주를 단일한 사실로 기억하는 방식은, 이념화된 기억 바깥의 상처들을 망각하는 공통점을 갖는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잊혀진 기억과 상처는 무엇일까?

“영화〈꽃잎〉을 보면 소녀는 엄마의 손조차 뿌리치고 도망가죠. 광주 안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도망쳤습니다. 그때 우리는 아무도 광주로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광주 바깥에는 침묵만이 있었죠.” 

하지만 그 침묵이 잔혹한 국가폭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면?

“정말 두려움 때문에 침묵했을까요? 오히려 우리에겐 근대화에 대한 열망, 박정희 이후에 자본화의 속도를 지탱할 만한 강력한 권력에 대한 기대가 있었던 게 아닐까요?”

문부식은 우리가 흐릿하게 잊고 있었던 그날의 기억들을 불러낸다. 광주에서 사람들이 무참히 죽어간 그 해 10월, 신군부가 주도한 헌법개정안에 대한 국민투표의 91.6 퍼센트의 지지율, ‘날갯짓 하면서 밝아오는 아침’을 노래한 ‘국풍 81’, 한국의 쟁쟁한 목사들이 모여 전두환 씨를 ‘하늘이 내려준 지도자’로 축복한 조찬기도회... 정말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을 목사들조차 두려움에 질려 내키지 않는 축복 기도를 했던 것일까?

“광주에는 우리 내면에 도사리고 있던 권력에 대한 욕망, 그들이 정지(整地)해 주길 바랐던 욕망이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광주에서 죽어간 이들은 우리 안에 내장되어 있던 욕망과 폭력의 희생양이었습니다. 그것을 참회하며 광주 시민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해하지 않고 신군부 몇 명에게 책임을 묻고는 이제 그만 됐다는 식으로 서둘러 봉합할 수는 없습니다.”

한편 물리적, 외적 피해가 보상의 기준이 되는 현재의 법적, 제도적 ‘청산’ 과정에선 희생자들의 기억과 상처가 물화(物化)될 수밖에 없다. 더 치명적이지만 외적으로 입증될 수 없다는 이유로 국가폭력에 희생당한 이들의 트로마는 고려되고 있지 못한 것이다.

“과거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은 국회의원도 되고 사회적 존중도 받으며 어떤 식으로든 이미 보상받았습니다. 반면 단 1주일을 갇혀 있었어도 더 치명적인 상처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직 있습니다. 진짜 상처 입은 사람은 보상받는다고 해서 그 상처가 없어지지도 않죠. 민주화운동조차 할 수 없었던 사람들, 정말 억울한 피해자들, 그렇게 이름을 불러주지 않고서는, 국가가 미안해하지 않고서는 안 되는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들의 태도였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는 희생자들의 상처는 우리 사회의 집단적 참회를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해마다 화해의 제단에 꽃을 바치고 있는 우리는 정말 미안해하고 있는 것일까?


연민을 앗아가는 국가주의의 주술

국가가 주도한 전쟁과 살인, 고문에 참여했던 이들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정상적으로 살아왔다. 어린 문부식에게 자신이 살해한 베트남인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시체 위에서 밥을 먹었다고 자랑하던 참전 ‘용사’는 지금도 용맹했던 과거를 추억하고 있을지 모른다. 왜?

국가주의의 주술은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켜 반(反) 이성으로 이끌며, 인간이 지닌 영혼의 가장 중요한 능력인 연민을 앗아간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광기의 시대를 생각함』중에서

그는 근대 국가의 ‘국민’ 개념은 통합의 기능뿐만 아니라 배제의 역할을 담당했다고 지적한다. 국민은 처음부터 ‘비국민’을 전제했다는 것이다. 국가가 지목한 ‘비국민’-북한군, 사회주의자, 베트콩, 삼청교육대 희생자 등-에게는 연민을 느끼지 않아도 좋다는 배제의 논리가 내면화된 것도 국가주의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문부식은 중국인들을 살해한 일본 군인들의 면책심리를 분석한 노다 마사아키의『전쟁과 인간』의 대화를 인용한다.

“당신이 죽인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습니까?” 대체로 그들은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이에 대해 그는 아주 단호하게 말한다. “그러면 당신은 그 사람을 물체로 느끼신 거군요.” 

“부산에서 신학대학을 다니던 20대 초반의 나는 계엄군으로 광주에 들어가 총을 쏘는 자리에 있게 되었을는지도 모릅니다.”

평범한 사람도 언제든 죽임의 상황에 던져질 수 있다. 그 역시 움직이는 ‘물체’들을 파괴하고도 죄의식 없이 목사의 길을 걸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숨이 막혔다.

“한나 아렌트는 유태인 학살에 책임이 있는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며 ‘악의 평범함’을 성찰했습니다. 그가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건 본성이 특별히 악해서가 아니라 사유하지 않고 ‘직무’를 수행했기 때문이었다는 거죠. 음악을 즐기고 자식을 사랑하는 평범한 사람들도 사유하지 않을 때 충분히 정치적 악행에 가담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문부식은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 역사의 희생자라는 ‘큰 거짓말’을 거부하며, 사유 없이 자행된 개인적, 집단적 광기를 고발한다.

“고문과 살상에 참여한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애국적인 것으로 여기거나, 국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변명합니다. 우리는 최소한 광주 현장에서 발포를 명령한 하급장교들까지 법정에 세웠어야 합니다. 처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국가가 명령한다 할지라도 사람에겐 총을 쏠 수 없다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했어야 합니다.”

문책은 없었다. 그래서 국가주의의 주술도 사라지지 않았다. 

“권력이 도전 받는 경우는 있었어도 국가 자체가 의문시된 경험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개인이 국민 외에는 어떤 형태로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전체주의 사회입니다. 국가를 거부할 수 있는 자율적 개인이 출현하지 않는데 과연 폭력 없는 세계를 꿈꿀 수 있을까요.”


우리 안의 파시즘

그 동안 문부식과『당대비평』은 국가주의 파시즘이 권력에 맞서는 사람들의 내면까지 통제하는 현실을 경계해 왔다. 우리 사회를 지배해 온 맹목적 근대화의 열망과 권력 장악을 둘러싼 대립의 과정에서 운동 내부에도 권력화된 위계주의, 중심과 주변의 차별, 집단주의적 사고, 군사조직화 등이 ‘일상적 파시즘’으로 내면화되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운동은 전위의 지도를 받는 노동자계급 중심으로 권력을 장악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정권을 바꾸고 권력을 장악하면 달라질 것처럼 주장하면서 지금도 민주연합이 맞나 독자후보가 맞나 다투고 있죠. 물론 대선은 중요하고 정치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권력만을 상상하는 것과, 다른 상상을 더불어 할 수 있다는 것은 다릅니다.”

그는 동원력과 전투력을 중시하면서 나타난 진보 운동 안의 위계적 권력화가 중심과 주변을 나누고, 주변을 동원 대상으로 여기거나 심지어 희생시키기도 했음을 지적한다.

“1998년 구조조정에 맞선 현대자동차 파업 때 정리해고에 동의하느니 죽겠다며 관까지 짜놓은 노조 집행부는 결국 회사와 타협하여 비정규직 노동자들인 식당 아줌마들이 내쫓기는 것을 방관했습니다. 영화〈밥․꽃․양〉은 투쟁할 땐 ‘밥’짓는 아줌마들을 ‘꽃’으로 대하다 결국 ‘양’으로 희생시킨 것을 고발한 것이었죠. 노동운동의 주력을 부정해선 안 되겠지만 운동 내의 다양한 처지와 목소리를 배려하지 않는 헤게모니적 운동방식은 반성해야 합니다.”

권력을 놓고 대립할 때는 조직 내적 위계가 효율적이었을는지 모르지만 그 때문에 저항의 휴머니즘을 잃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권력을 바랐던 근본 동기―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위하는―를 망각할 때 파시즘이 스며드는 것이 아닐까?

“진보운동이 스스로를 반성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지난한 투쟁과 고통, 한계를 정직하게 기억하며 성찰하지 않고 우리는 늘 정당했다고만 강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지만 진보의 비판적 성찰이 그의 기대처럼 사회의 다른 영역의 성찰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조선일보〉는 그의 성찰을 ‘참회의 계보학’에 포함시키며 보수담론 확산에 이용하지 않았는가?

“일정한 전유의 영역이 있어 지식인의 발언이 왜곡될 여지는 항상 존재합니다. 하지만 레닌이 말한 것처럼, 적을 이롭게 한다고 해서 우리 자신 안의 모순을 말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과거 운동에 대한 기억이 공공 영역에서도 소통되게 하려면 우리의 잘못도 냉철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이제는 자신의 집단에 이로운 것은 무조건 최고의 선으로 받아들이는 풍토, 진보를 비판하는 것은 보수를 돕는 것이라는 진영론적 사고를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부추기는 언론도 변해야 합니다. 운동이 제대로 되려면 진보에 대한 비판이 진보적 매체에도 자꾸 나와야죠. 지금은 다른 이야기들을 포용해 가는 진보의 자발적 유연성이 더욱 필요한 때입니다.”

흑과 백보다 회색에 더 공격적인 사회에서 양 진영론을 벗어나려는 그의 선택이 위험해 보인다.

“절충적인 제 3의 길을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좌파 지식인인 귄터 그라스가 2차 세계대전 중의 독일인 희생을 다룬『게 걸음으로 가다』를 쓴 데는 좌파가 먼저 제기하지 않으면 우파가 전유한다는 인식도 있었습니다.(1945년 1월 30일 ‘붉은 군대’를 피해 피난을 떠난 독일 민간인들을 태운 구스틀로프호가 소련 잠수함의 공격으로 침몰하여 9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 대부분이 여성과 어린이들이었음에도 전범국 국민의 희생이었다는 이유로 이 사건은 논의 자체가 금기시 되어 왔다.) 우리는 보수담론에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진보적 매체들이나 북한까지도 비판하는 것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문부식의 사유는 신중하게 탐색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게 걸음’을 연상시킨다. 기존의 진영론적 관점에서는 그것이 위험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매 순간마다 인간다움의 자리를 살피고 또 살피려는 노력은 진보의 확장을 가져오는 근거가 되지 않을까?


나약한 문명을 위한 저항 

“영화〈계엄령〉에서 독재정권을 지원하던 미국인이 해방전선 지도자에게 ‘우리는 기독교 문명을 위해 싸운다. 너희는 무슨 문명을 위해 싸우는가?’라고 묻습니다. 그 지도자는 ‘나약한 문명을 위해 싸운다.’고 대답하죠.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짓밟는 것에 맞서, 약한 것도 소중히 여기는 문명을 위해 싸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시대의 저항은 특별하고 예외적인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 속에서 사유하는 보통 사람들의 몫이라고 여긴다.

“박노해 시인은 자신이 사형당하지 않을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성호를 그으며〉라는 시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과장하고 끝내 ‘혁명의 성호를 그으며’ 산 자들을 가르치려고 했습니다. 내가 그를 비판했던 것은 운동은 예외적인 사람만이 하는 것이라는 두려움을 줬기 때문입니다. 영웅주의는 깊이 없는 가벼움과 초조함에서 옵니다.”

“신학생 시절부터 지금까지도 운동이 뭘까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건 옆에서 누가 맞고 있는데 모른 척 지나가기엔 마음이 찔리는 것, 옆에서 누가 굶고 있는데 혼자 먹기가 찔리는 것, 그래서 에라, 좀 덜 먹어도 나눠 먹고 맞더라도 같이 맞자는 결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는 진보 운동을 아름답게 만들어 온 것은 평소에 나약해 보였던 평범한 이들의 용기 있는 행동이었음을 기억한다.

“인간의 강함이란 전선의 앞, 외형적 결의나 투사 같은 말투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조사 받을 때 강한 체했던 나는 마구 무너졌지만 가장 약해 보였던 친구는 울면서도 끝까지 굴하지 않았습니다.”

“일본 시민운동을 보세요. 운동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새로운 역사교과서』채택률을 0 퍼센트 단위로 낮춰 버렸습니다. 삶의 자리에서 작은 운동을 계속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죠. 갇혀 있을 때 나를 도와 줬던 일본인들도 평범한 생활인들이었습니다. 소박하게 바자회를 열어 만든 돈을 들고 한국까지 찾아와 영치금으로 넣어 주었죠. 그런 운동을 몇십 년 동안 계속하고 있습니다.” 

문부식은 권력이 아닌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작은 운동, ‘수평적인 우애의 아비투스’가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기대한다.

“내가 전선을 교란시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왜 전선을 넓힌다고 생각하지 않는 거죠? 지금은 비록 약하지만 새롭게 등장하는 작은 싸움들, 소수자 운동, 권력이 아닌 길을 선택하는 상상력을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걸까요. 총선, 대선 잘해서 정권 장악하지 않으면 다 끝날 것처럼 이야기하기보단 오히려 지방 선거, 동네 선거 같은 작은 싸움에서부터 조금씩 이겨가며 삶을 바꿔나가야 합니다. 이 땅의 낙원은 순간순간 그런 관계를 만들어갈 때 이루어지는 것 아닐까요?”


종교는 성찰적인가? 

내가 말하는 성찰이란 사태의 단순한 기술을 넘어 사태의 근본에까지 파고 들어가 그것들과 정직하게 대면하는 것으로부터 오는 자기 성찰이자 반성을 의미하는 것이다.-『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광기의 시대를 생각함』중에서

진보 운동이 성찰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문부식 한 사람만의 외로운 발언이 아니다. 시민운동의 목표는 성찰적 시민의 확대를 통한 사회 변화라는 인식도 있고, 반드시 종교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NGO 활동가들에게도 ‘시민운동의 영성’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깊고 풍부한 사유를 바탕으로 할 때 사회적 공감과 실천이 질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면적, 종교적 성찰과 사회적 성찰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자기 고통과 사회가 만나고, 개인적 성찰이 사회와 만나는 곳에서 사람이 변화합니다. 종교적 성찰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이 인간다운 건가, 사람답게 사는 것이 뭔가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문부식과 대화하면서 자꾸만 한국 기독교의 현실을 떠올렸던 것은, 그가 성찰한 ‘폭력’, ‘희생자에 대한 배려’, ‘국가로부터의 자유’와 같은 주제들은 우리 기독인들이 먼저 성찰했어야 할 내용이기도 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예수는 권력이 아닌 길을 걸었는데 그를 따른다는 우리는 오히려 권력을 욕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은 종교에 대한 ‘냉담자’라 자처하는 문부식의 성찰이 종교보다 더 종교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연 오늘의 한국 기독교는 성찰적인가?

“현재의 기독교를 낙관할 순 없지만 교회는 개인적, 사회적 성찰을 할 수 있는 사고의 훈련과 지적 태도를 가진 집단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교회부터 먼저 자기 성찰을 해야겠죠. 나는 그런 역할을 할 사람들이 기독교 안에 있을 거라고 기대합니다.” 

문부식은 자신의 글이 ‘하나의’ 방법론으로 읽혀지기를 바랐다. 잊혀졌던 상처들이 말하기 시작하고 더 많은 성찰들이 대화하게 되면 우리 사회도 변화할 수 있을까? 다섯 시간이 넘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나는 신체의 통증을 느꼈다. 아프지만, 통증이 삶을 입증한다.
                

계간 새길이야기 2002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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